#8 우리는 그를 흰수염이라 불렀다

오늘도 하루종일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어디보자… 회사에 정식으로 입사하고 1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 나는 신입사원의 필수 코스라 할 수 있는 신입사원 교육에 징집되었다. 아직 서로 누가 누군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교육이었던지라 교육장소까지 가는 버스 안은 침묵만이 가득했다. (내가 탔던 차만 그랬나 싶어 다른 차에 탄 동기에게 물어봤는데, 그 차도 똑같았다는 대답을 들었으니 다른 차들도 마찬가지 상황이었을 것이다.)
 
 버스 안을 가득 채운 침묵을 견디다 못해 잠을 택한지 2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정장을 입은 쭈구리들을 태운 6대의 버스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교육장에 도착했고, 그 순간부터 우리의 인솔을 맡은 인사팀의 선배 사원들은 부쩍이나 바빠졌다. 인사팀의 직원들은 짐을 풀 시간도 주지 않고 우리를 대강당으로 밀어넣었고, 모두 들어갔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강당의 문을 닫았다.
 
 강당 안에는 여러 개의 테이블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렬되어 있었고, 그 테이블 위에는 쭈구리들 각각의 이름표가 올려져 있었다. 어떤 기준으로 분류된 것인지 알아내고자 하는 시도가 잠깐 있었지만 그것은 잠깐의 웅성임으로 끝났고, 도무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기준에 의해 자리에 앉자마자 또다시 숨막힐듯한 침묵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아… 안녕하세요?”
 
 동기들끼리 자기소개를 하는 건지 면접관 앞에서 면접을 보는 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숨막히는 통성명의 시간이 지나자 강당은 침묵 대신 작은 웅성임으로 조금씩 채워져 갔다. 어느새 친해진 것으로 보이는 몇몇 테이블에서는 이야기꽃이 피기도 했고, 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어렴풋이 ‘우리가 뭔가 같은 조인가보다.’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누가 이렇게 떠드나! 여기 놀러왔어!?”
 
 화기애애하게 변하려던 강당의 분위기를 다시 빙하기로 돌려놓으며 등장한 남자(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인사팀의 차장님이었다.)는 분노로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단상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입 주위의 하얀 수염을 거칠게 움직이며 ‘아직 학생 물이라곤 요만큼도 빠지지 않은 정신 나간 놈들!’ 이라는 표정을 지은 그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일갈했다.

 
 
 
ⓒ 누가 이렇게 떠드나!!!
(애니메이션 ‘원피스’ 中)

 
“내가 물어봤다! 여기 놀러왔어?! 왜 대답들이 없나?!”
 
 강당에는 다시 정적만이 흘렀다. 주위 여자 동기들의 얼굴을 보아하니 그녀들은 갑작스러운 큰 소리 + 꾸지람으로 인해 잔뜩 주눅든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휴 큰일났다, 분위기 엉망이다, 엄청 혼나려나보다, 우리 평가 엉망이겠다 등등…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여자 동기들과는 사뭇 다른,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 동기들의 눈빛을. 우리는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최초의 큰 소리에 흠칫 놀랐지만 이내 정신을 다잡았고, 의혹 섞인 눈빛으로 단상을 바라보자 그제서야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맙소사. 그는 군대 조교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신병교육대도 아니고 신입사원 교육에서 군대 조교라니. 심지어 머리를 밀기는커녕 단발머리와 긴 머리 아가씨들이 가득한 이 곳에서!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계속해서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고자 노력했고, 그럴 때마다 그의 입 주위에서는 하얀 수염이 격하게 춤을 추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은 하얀 수염이 아니라 열변을 토한 결과물인 게거품… 이었다. 이미 게거품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저쪽에서는 이미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쿡쿡거리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신입사원들의 군기를 잡고 보람찬 교육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아쉽게도 그를 간지의 상징 흰수염에서 단순 게거품으로 격하시켜 버렸고- 그와 비례하게 우리의 신입사원 교육은 그만큼 심적으로 편하고 여유로워 졌다. 너무나도 무서운 신병교육대가 순식간에 아름답고 즐거운 예비군 훈련장으로 바뀐 기분이랄까.
 

ⓒ 아 웃어서 죄송합니다. 웃긴걸 어떻게 해요
(웹툰 ‘선천적 얼간이들’ 9화 中)
 
 
연수가 끝난 지금도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만나면, 나는 활짝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한다. 그 때마다 그도 방긋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기는 하는데, 아무리 봐도 나를 기억하는 것 같지는 않아 내심 서운하다. 물론 나는 그가 맡았던 수많은 신입사원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은 알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 나를 몰라줄 때의 아쉬움이랄까… 뭐 그렇다.
 
요즘도 동기들과 만나면 종종 흰 수염(그 차장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아직도 신입사원 교육에 함께 가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흰 수염과 게거품에 대해서는 아마 영원히 말할 수 없겠지…사회 생활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 내게 가장 먼저 임팩트를 남긴 남자. 우리 마음속의 영원한 흰 수염. 이 칼럼을 그에게 바친다.
 
여자 동기들은 결국 신입사원 교육기간 내내 주눅든채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의 입가를 한번만 주의깊게 봤더라면 정말 달라졌을 텐데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사실 인사를 하면서 제가 그의 입가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저만의 비밀입니다. 그라라라-
 
 
쭈구리   
오늘도 하루종일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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