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주머니속의 송곳에 구멍이 뚫렸을때

오늘도 하루 종일 쭈그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 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 찰리 채플린 – 모던 타임즈 中
 
"너 하나 없다고 회사가 안굴러갈것 같아? 너는 회사라는 거대한 기계의 일개 부속품일 뿐이야."

 회사생활에 지쳐버린 인간군상이 등장하는 모든 매체(영화, 드라마, 소설 등등)에서 꼭 한번씩은 등장하는 이 말은 - 서슬 퍼런 상사가 말하느냐 다정한 선배가 말하느냐에 따라 그 어감에 차이는 있지만 - 지쳐버린 주인공을 다독이거나 깨달음을 주기 위한 단골 소재로 쓰인다. 이 말은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한 세상의 진리를 담은 말씀처럼 모두가 공감하고 인정하는 말이 되어버렸고, 이 말을 들은 쭈구리들은 안 그래도 쭈그리고 있던 몸을 한껏 더 쭈그리게 된다. 나는 그저 일개 부품일 뿐이니까. 


 오피스N의 칼럼 중에서 인사담당자들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구직자는 '입사의지를 강하게 표현하는 사람' 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입사의지를 강하게 표현한 사람일 수록 회사에 대한 충성심과 소속감이 강하고, 그만큼 퇴사 비율이 적기 때문이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거, 동전의 한쪽 면만 보고 다른 쪽 면은 보지 않은 것 같아 마음속으로 100% 공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얼마 전에 동기 중 한명인 W가 퇴사를 했다. 입사 의지를 가장 강하게 보여 다른 회사에 합격했음에도 우리 회사를 택했고, 자신의 전공과 잘 맞기도 했고, 시키지 않은 일도 찾아가며 척척 해내서 팀 내 신입사원 중에 단연 기대주로 꼽혔던 W 였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인사담당자의 말이 맞는다면 그는 절대 퇴사를 할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퇴사의 표면적인 이유는 '대학원에 가서 석사 공부를 하고자 한다.' 였지만 나를 비롯한 다른 동기들은 그가 어째서 퇴사를 결심했는지 알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회사에 대한 실망감' 이었다. 

 주어진 업무를 따라가며 수행하기조차 벅찬 나에 비해 그가 가지고 있는 역량은 매우 컸고, 그만큼 이 회사에서 이루고 얻고자 하는 바도 컸다. 그는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뾰족한 송곳이었고, 기계를 구동시키기엔 조금은 다른 모양으로 생긴 부품이었던 것이다. 그가 업무에 관심을 보이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이자 주위에서는 그에게 이것저것을 다양하게 시켰고, 부여했으며, 결과를 원했다. 그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한 사람들이 그의 의욕을 꺾기 위해 그랬던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을 시키고 원했던 것이지만, 그 와중에 W는 점점 의욕을 잃어갔다. 대기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지나치게 많은 프로세스와, 너무도 두루뭉실하게 지시를 내리는 상사의 불명확성에 W는 힘들어했다. 그리고 특히 그의 마음을 더 꺾은 것이 있었으니, 어느 순간 자기가 이 회사를 위한 '부품'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의욕이 넘치던 사람의 의욕이 꺾이자, W가 회사에서 느끼는 감정은 기존과는 너무도 달랐다. 불타버린 투 페이스의 동전처럼, 예전에는 회사에 출근하는 것을 즐거워하던 W가 어느새 "내가 이 회사에서 뭘 더 배울 수 있겠어." 라던가 "나도 결국 저 상사들처럼 되고 말겠지."와 같은 말을 입버릇처럼 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 퇴사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뾰족한 송곳은 결국 주머니를 뚫어버렸고, 송곳을 담지 못한 주머니에서 송곳은 빠져나가게 되었다.




ⓒ 정말 참는 게 최선일까요…?
 
 스페셜리스트 1명에게 의존할 수 없고 여러 명의 제너럴리스트들에 의해 운영되는 대기업이라는 조직의 특성상, 회사를 위한 부품이 되고 톱니바퀴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구조를 인정한다고 해서, 회사를 박차고 떠난 W를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거나 당장의 어려움을 피해 도망친 사람이라 매도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우리 회사를 포함한 여러 기업들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선진 기업문화'라는 건 뾰족한 송곳이나 조금 다르게 생긴 부품이라 할 지라도 모두 포용하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선진 기업문화' 라는 게 높으신 분들의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그들의 외침이 아래로 쭉쭉 내려와야 하고 각자의 개성을 살리면서 조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적용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사회에서 잔뼈가 굵은 부품들이나 나같이 쭈그리고 있는 부품들이나 한마음 한 뜻이 되어 공동의 목표를 향해 으쌰으쌰- 하는 이상적인 회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실성 없이 이상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회사에서 정해준 틀에 맞는 형태의 부품이 되어 영원히 굳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오늘도 의미 없는 소리를 주절주절 떠들게 되었다.


 학생이 보는 회사와, 자기가 직접 다니며 보는 회사와, 다니다가 그만두고 나가 다시 밖에서 보는 회사는 모두 다른 모습이겠지. W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다녔었고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이 회사가 어떻게 보이는지.
 
 
니 능력의 70%만을 보여라. 업무는 항상 그 이상으로 밀려드니까.” 라는 말도 참 유명한 말 같더군요. 이 말도 사람을 참 슬프게 하는 말입니다. 아직 쭈구리에 불과한 저도 이런데 직장생활을 오래 해온 분들은 어떠실까요. 자기 능력을 감춰야 하는 회사라니. 참 씁쓸합니다.




쭈구리   
오늘도 하루종일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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