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백안의 그녀.

오늘도 하루종일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 커피 한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 있는 여....자?!

 

 

 보통 어느정도 규모가 되는 회사의 경우 1층 로비에 카페가 있는데, 이는 우리 회사도 예외가 아니어서 매일 아침 출근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카페를 이용한다. 사원증을 이용하여 결제하면 보통 가격보다 저렴하게 마실 수 있는 데다가 목으로 넘길 수만 있으면 크게 음식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커피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도 종종 카페를 이용하곤 한다. "이런 카페 하나 있으면 노후걱정은 없겠다."거나, "하루에 여기서 팔리는 커피가 몇잔이나 될까?"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카페에 가는 것은 절대.. 까지는 아니고, 무튼 아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어느정도 좋은 이 카페가 성황리에 영업을 하는 이유는 지리적인 조건(우리회사 뿐 아니라 주위 회사에서도 와서 커피를 사가는걸 보면 말 다했다.)을 비롯하여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를 선택하자면 사람들의 '내기' 덕분일 것이다. 똑같은 음식을 먹어도 공짜로 먹으면 더 맛있고, 심지어 내기에 이겨서 공짜라면 그 맛이 더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점심시간 잠깐의 여유를 이용해서 커피내기 한판!은 회사에서 찾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소소한 행복이다.

 

 내기의 방법은 다양하다. 시공을 초월하여 백년 뒤에도 할것이 틀림없는 '가위 바위 보' 부터 각자 카드를 꺼내서 추첨하기, 사다리 타기 등등등.. 그 중에서도 각자의 사원증을 뽑아들고(회사 사원증을 태그하면 1층 카페에서 계산이 된다.) 알바생에게 하나를 골라달라고 하는 일명 '사원증 털기' 는 회사에서 가장 인기있는 내기 방법이다. 어떤걸 뽑을까 고민하는 알바생과 자기의 사원증이 뽑혀 나올까봐 조마조마하는 사람들. 그리고 결국 뽑힌건 내 옆사람일때의 쾌감! 역시 이 맛에 내기를 하는 거겠지!

 

 

 

 

ⓒ 내기에 무승부가 어디있어 임마 

 

 

 그런데 이런 소소한 쾌감과 행복은 주니어들만 찾는 것이 아니어서, 팀에서 다같이 점심식사라도 하는 날이면 그날은 팀 전체에 커피를 쏴야 하는 사원증 털기가 개최된다. 부장님이 어느 팀에서 보고 온건지는 모르겠지만 팀 모두가 커피를 들고 하하하 하는 모습이 화기애애해 보이셨다나? 단순 커피 내기를 위해서라면 그때그때 사다리 타기라거나 다른 내기 방법도 얼마든지 있을텐데 언제나 사원증 털기만을 고집하는걸 보면 팀의 화기애애보다는 단순히 사원증을 털어보고 싶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사원증 털기는 팀 점심식사 후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가 되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보통 날.

 우리팀에 새로 온 비서를 환영하기 위한 평화로운 점심식사 후,  흥이 오른 부장님이 언제나처럼 다같이 사원증을 털어보자며 카페로 들어갔다. 팀장님을 포함한 팀원 전원의 사원증을 손에 쥔 부장님은 새로 온 비서에게 "이 중에서 2장만 골라보라-"며 사원증을 내밀었다. 지금까지 수 차례의 털림이 있었지만 단 한번도 침략받은적 없던 자신의 전적을 생각하기라도 했는지 부장님의 눈빛은 확신에 가득차 있었다.

 

번뜩-

 

 그 순간 그녀의 눈이 폭풍드랍을 노리는 홍진호의 눈빛처럼 빛났다는 것은 나만 눈치챘을 것이다. 부장님이 자신의 눈 앞에 사원증을 내밀자 마자 번뜩인 그녀의 눈빛은 마치 '백안'을 쓰는 것 처럼 사원증을 살폈고, 드디어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Naruto_-_White_Eye_(2).jpg 

ⓒ 당신의 사원증이 무엇인지 찾아내 주지! 

 

 

 

 

스윽-

 

 그녀는 자신이 일말의 고민 없이 뽑은 2장의 사원증을 '내가 걸릴 리 없지!'라는 확신에 가득찬 눈을 하고 있던 부장님께 건넸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무엇인가를 느꼈던 것일까? 사원증을 건네받는 부장님의 손은 여느때와 다르게 떨렸고, 왠지 오픈을 주저하는 듯 했다. 그러나 결국 주위의 시선을 이겨낼 수는 없었고, 부장님이 오픈한 2장의 사원증은 다름아닌 팀장님과 부장님의 사원증이었다. 

 

 그냥 뽑았을 뿐인데 팀내 서열 1위와 2위의 사원증을 기가 막히게 뽑아내다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팀장님과 부장님을 뒤로 한채 그녀는 또각또각- 카페 카운터 앞으로 걸어갔고, 이번에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메뉴를 주문했다.

 

 "요거트 스무디 주세요."

 

 요거트 스무디라니! 달달한 것이 맛은 좋지만 카페에서 파는 메뉴 중에 가장 비싸서 "내 돈 내고 먹기에는 아깝고, 얻어먹자니 눈치보이는" 바로 그 메뉴인 요거트 스무디라니! 주문을 마친 그녀는 뒤를 돌아 부장님을 바라보며 '이거 시켜도 되죠?'라는 눈빛을 보냈고, 기세에 눌린 부장님은 "그.. 그래, 먹고싶은거 어서들 골라. 어허허허허." 라며 메뉴 선택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비록 개인적인 일로 인해 그녀는 2개월만에 우리를 떠나갔지만, 그날 우리팀 전원은 요거트 스무디를 먹었고- 우리 팀원들의 기억속에 그녀는 '타짜'로 남게 되었다. 그녀가 아직도 함께 있다면 그 '백안'을 전수받았을 텐데. 오늘도 사원증을 털자는 부장님을 바라볼 때마다 그녀가 너무나 보고 싶다.

 

 

 '요거트 대첩' 이후 저는 '백안의 그녀'에게 높으신 분들의 사원증을 찾아낼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은 이외로 심플했고, 타당했으며, 합리적이었습니다. 그냥 스윽- 보면 높으신 분들의 사원증을 찾아 낼 수 있겠더라구요. 왜냐구요? 그 분들의 사원증은 (오래 된 관계로) 더이상 빛나지 않아요. 여기저기 긁힌 자국도 많이 있구요. 하지만 이 방법을 어디 가서 많이 이야기 하지는 말아주세요. 팀의 높으신 분들이 사원증을 갱신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ㅠㅠ  


쭈구리   
오늘도 하루종일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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