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을 거야.

오늘도 하루종일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신입사원 연수 시절, 가장 인상 깊었던 교육과정은 바로 '메일 예절' 에 대한 수업이었다. 
 
"전 세계에 있는 직업의 종류는 대충만 따져봐도 100만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직업의 종류만큼 사람들의 일하는 방식도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여러분들의 직업이 될 '회사원'의 일하는 방식은 크게 보면 2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메일이고, 하나는 전화다."
 
라는 말로 시작된 수업은 신입사원들에게 어떠한 상황을 주고 그에 맞는 메일을 직접 써보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교육이 생각보다 효과가 매우 좋아서 아직까지도 업무를 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메일을 쓰려다 보면 당장 제목부터 막막한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이 수업 내용을 다시 떠올려 보면 용케도 적절한 제목이 떠오르니 말이다.
 
 
ⓒ 아아.. 이 창작의 고통이란..
 
 
오늘도 언제나처럼 메일을 보내며 일을 하다가 문득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메일을 어떤 식으로 쓸까?'라는 영양가 없는 생각이 머리속을 스쳤다. 모름지기 생각이 떠올랐을 때 바로 움직여야 뭐라도 되는 법. 각기 다른 일을 하는 주위 지인들에게 신입사원 연수 중 받았던 수업처럼 특정한 상황을 주고 그에 맞는 메일을 받아보았다. 
 
지인들에게 주어진 상황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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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다음주 식사'를 하기 위해 메뉴를 선정해야 하는 중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오랜 시간 노력한 끝에 대략적인 메뉴는 정해졌고, 이제 유관부서 사람들이 모여 최종 결정을 내리기만 하면 된다.
당신은 이 결정을 위한 회의를 소집해야 하며, 회의는 금주 목요일(8/14) 오후 3시, 본사 13층 2 회의실에서 진행할 것이다.
유관부서 사람들에게 회의를 공지하고, 참석을 요청하는 메일을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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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주어진 상황 이외에 다른 설명은 하지 않았으며, 단지 "업무 메일을 보내는 느낌으로 써달라-" 고 요청했는데, 회신온 메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메일에는 개개인의 특성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으니 ‘이 회사는’ 이라던가, ‘이 직군은 메일을 이렇게 쓰는구나!’ 하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먼저, 내가(A그룹에 재직 중) 평소 업무 메일을 쓰듯 썼다면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업무를 함께 진행했으니 데면데면한 사이는 아니겠지만, 공식적으로 회의를 요청하는 메일인 만큼 별다른 사족 없이 내용만을 담으려고 해 보았다. 그리고 제목의 『[공지/요청] + ~의 건』은 신입교육 때 배운 공식 form 이다.
 
 
다음은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친구의 메일이다. 미리 얘기하자면 이 친구, 본인은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되게 까칠하고 틱틱대는 녀석이다. 아마 이 글을 보면 또 나를 혼낼지도 모르겠지만, 거짓을 말할수야 없지.
 
 
 
 
 『안부 인사 + 유종의 미 + 약도』 라니.. 평소에 카톡으로 약속장소 위치 알려주는것도 귀찮다고 알아서 찾아오라는 인간이 사실은 이렇게나 친절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메일이었다. 앞으로는 친구가 아니라 업무적인 관계로 묶여야 하는 건가..? 진지하게 궁서체로 고민해 봐야겠다. 나한테도 평소에 이렇게 좀 대해봐..
 
 
다음은 B그룹의 연구소에 재직중인 분의 메일이다. 직장인 커뮤니티 등에서 보이는 이 회사의 이미지는 굉장히 수직적이고, 남성적이라고 들었기에 어떤 메일이 올까 내심 궁금했는데 메일을 받고 보니 의외로 평범하고 우리 회사와 큰 차이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역시 일하는 방식은 거기서 거기
 
 
 
 
“형 상황극좀 해줘. 회사에서 업무메일 보낸다고 생각하고 내가 준 상황에 맞게 메일 쓰면 됨 ㅇㅇ” 이라는 말에, 다른사람들은 물어보지도 않았던 “나 그 사람들이랑 친한거임?” 이라는 질문을 하더니 종로구청 식사 프로젝트라는 생각지도 못한 애드립을 발휘해 주었다. 나는 시간을 15:00 로 썼는데, PM 3:00이라고 적은 것이 눈에 띈다.(그리고 나는 PM이 오후를 말하는 건가 다시 찾아보았다.)
 
 
다음은 언론사에서 일하고 있는 지인의 메일이다. 본 칼럼에 있는 여러 사례들 중 유일하게 여성이 써준 글인데, 남중-남고-공대 로열 로더는 웁니다 확실히 칙칙한 남자들의 메일과는 느낌이 다르다. 그런데 사실 이게 성별 때문인지 직종 때문인지, 아니면 개인 차이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우선 내용을 보자.
 
 
 
 
완전 감정 이입해서 적었다더니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다른 메일과는 다르게 산문이라고 해야하나- 무튼 줄글 형식으로 작성된 점이 신선하다. 무엇보다도 디테일이 활어회처럼 생생하게 살아 숨쉬며(조용하고 독립된 공간 + 교통이 편리한 곳을 알아보다니), 광화문 파이낸스센터 지하의 싱카이에 가보고 싶게 만드는 메일이었다. 그런데 이 누나 뭐지? 싱카이에서 알바하나?
 
 
다음은 C그룹에 재직중인 형의 메일이다. C그룹의 경우 일반적으로 ‘쿨함’, ‘스마트함’의 이미지로 표현되는 곳인데 이 형은 ‘쿨함’ 보다는 ‘다정함’, ‘스마트함’ 보다는 ‘아아…..’의 이미지가 강해서 처음 C 그룹에 취직했다고 했을 때 많이 놀랐던 적이 있다. 물론 표현되는 이미지와 실제 회사의 분위기가 전혀 다른 점 + 개개인의 성격과 회사의 이미지 또한 별 상관이 없는 점을 알아버린 지금은 그 무엇도 놀랍지 않다. 그냥 다 직장인이지 뭐. 메일이나 보자.

 

 
『‘제위’ 라는 말은 ‘여러분’을 문어적으로 이르는 말로써, 쉽게 말하면 수신자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고 네이버가 설명해 주었다. 유관부서 수신처 '제위' 라니. 이 형이 이렇게 어려운 말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형 되게 멋있어 졌구나..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회의'소집'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원래 이런 일 있으면 “B야 올 수 있어?”라고 물어보던 형이었는데 ‘소집’이라니… 사람이 변했어… 이것이 직장인의 힘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공기관을 상대하는 연구소에 재직중인 형의 메일이다. 주로 공무원을 상대하는 이 형은 너무도 당연하게 “야 이런 상황이면 우리는 공문을 보냄 ㅇㅇ” 이라고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문서양식 그대로를 이용하여 공문을 보내 주었다. 덕분에 제목이나 다른 내용들은 캡쳐할 생각도 못하고, 양식 안의 내용 일부만 캡쳐해야 했다..
 
 
 
메일이 아니라 공문이라서 그런가… 바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첨부파일을 다운받아 열어봐야 해서 그런가… 아니면 단지 이 형의 얼굴이 떠올라서 그런가… 공문은 뭔가 낯설다. 본인이 먹고 싶은 메뉴인지 그냥 무난한 메뉴를 선정한건지는 모르겠지만, 4개의 메뉴를 제시한 센스에는 박수를 보낸다. 역시 고기겠지! 그 와중에 “1. 귀 기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는 말이 ‘아 공공기관과 일하는구나!’는 느낌을 주는 것이 인상적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은 업무 메일을 어떻게 보내는가?!” 가 궁금해서 시작했던 일인데, 어느새 이렇게 커져서 그림 파일이 무려 6개나 들어간 장문의 칼럼이 되어 버렸다. 길다고 안읽으면 어쩌지 뿐만 아니라 주위 지인들의 드립력이나 디테일 등의 새로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여서 개인적으로 이번편은 굉장히 참신한 기획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게도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메일의 느낌이나 사용하는 단어에 차이는 있겠지만 다른 직종의 사람들은 메일을 어떻게 쓰는지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귀 귀관의 발전을 기원 + 약도 첨부 + 유종의 미”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응용이 가능할 테니까.
 
 
마지막으로, 정성스레 메일을 써준 지인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이 칼럼이 업로드 되면, 조용히 링크 하나를 공유해 줘야겠다.
 
 고마워요 모두들. 이렇게 쓰일줄은 몰랐을거야~
 
 
칼럼에서 단순히 'A그룹', 'B그룹'이라고 적어둔 곳은 정체를 밝힐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기업 이랍니다. 재미로라도 각 그룹별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볼 수 있겠다~ 고 기대했는데 그러기에는 자료가 너무 부족하네요. 별 차이 없어 보이는건.. 저 혼자만의 생각인가요?
 


쭈구리   
오늘도 하루종일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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