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갑돌이와 갑순이

오늘 하루도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 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일정 규모 이상의 자산 및 종업원을 갖추고 큰 매출을 올리는 기업. 그 기준은 일상 용어에서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한민국 내에서의 법적인 정의로는 중소기업기본법 제 2조에 의거한 중소기업의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 기업들을 의미한다. 이 법령에 따르면 다음 중 하나 이상의 요건이 되면 대기업으로 볼 수 있다.

1. 상시 근로자 수가 1천명 이상인 기업
2. 자산총액이 5천억원 이상인 기업
3. 자기자본이 1천억원 이상인 기업
4. 직전 3개 사업연도의 평균 매출액이 1천 5백억원 이상인 기업
   그리고 내 마음대로 하나 추가하자면.. 5.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기업. 내가 다니는 회사는, 대기업이다.
 

 

ⓒ 그러하다고 합니다.
 

 계약서 상에서 나온 것으로 계약서에 자주 등장하는 “A(이하 을이라 칭함)는 B(이하 갑이라 칭함)에게…”로 시작하는 문장이 그것이다. 본래 거래처가 갑이 되면 납품업체는 을이 되면서 을이 갑의 입장을 들어주지 않으면 갑이 거래처를 옮겨버리면서 을의 매출에 심각한 타격이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을이 갑에게 눈치를 보는 관계를 의미한다. 대기업인 우리 회사는, 이다.
 

 

ⓒ 태어나보니 아빠가 회장
 

 처음으로 업체와 미팅이란 것을 하는 날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진행되었고, 그날 저녁은 이번 프로젝트와 관련 있는 우리 팀원과 협력사 직원들이 함께 회식을 하게 되었다. 처음 만나는 자리니만큼 명함을 두둑히 챙겨간 나는 보는 사람마다 족족 명함을 건네주고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몇 잔의 술과 함께 회식은 계속되었다. 프로젝트를 잘 해보자고 의욕적으로 만든 자리이니만큼 테이블 위의 술병은 늘어만 갔고, 평소 술을 잘 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제 슬슬 한계점에 가까워지려는 시점이었다.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여기에서 지옥을 라이브로 보게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식당 마당으로 나갔다.

 

ⓒ 이러려고 한 회의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50대 초반은 되어 보이시는 협력사의 이사님이 홀로 나와 담배를 태우고 계셨다. 별로 방해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사님은 마당으로 나온 나를 보자마자 황급히 태우던 담배를 꺼버렸다. 괜히 방해한 것 같기도 하고, 아까 인사도 제대로 못했던 터라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그분께 건네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B라고 합니다. 아까 인사를 못드려서 이제야 인사를 드리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야죠. 저는 xxx 라고 합니다. 허허허허.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야 한다니. 이 한마디가 내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오죽하면 술이 다 깼을까. 입사한지 아직 1년도 안된 애송이인 나는 「제가 아직 많이 무지하고 경험이 없어 많이 답답하실수 있으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 부탁드립니다.」는 의미로 말한 것뿐이었는데, 뭔가 그 이사님에게 압박을 가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절대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이러려고 인사드린건 아니었습니다…
 

 주위에 자영업이나 사업을 하시는 친구 아버님들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분들도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에게 ‘저야말로 잘 부탁드린다’며 인사를 하시는건 아닐까. 친구놈을 데려다 앉혀놓고 「너희 아버지한테 잘해 임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후로 협력사 분들과 통화를 하거나 만날 일이 있으면 혹시 그분들이 불쾌하시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 행동도 말도 조심하게 되었다.
 
 그 이사님에게 갑은, 내가 아니라 우리 회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 명함에 박혀있는 회사의 이름은 나를 유사 갑으로 만들었겠지. 나는 비록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리고 그분들은 이 업계에서 벌써 몇 년을 활동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나는 갑일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나 같은 갑돌이와 갑순이들이 수두룩하게 널려있을 것이다. 나는, 그리고 갑돌이와 갑순이들은, 대기업에 다닌다.
 
 
 항상 조심한다고 하는데도 사람인지라 후회하고 반성할 일이 종종 생깁니다. 저만 반성하고 넘어가서 될 일이라면 좋겠지만, 저와 함께 일하시는 분들이 불쾌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됩니다. 이런 마음이 무뎌지면 나도 갑놈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참 조심스럽습니다.




쭈구리   
오늘도 하루종일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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