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평가의 계절

오늘 하루도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 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고3 수험생들의 봉인을 풀기 위한 것이었을까. 요 몇 일 사이에 갑자기 추워진 날씨가 기승을 부려 사무실 내에 감기가 대 유행했다. 유자차 향기와 함께 콜록임 사운드가 사무실에 가득하고, 실내에서 망토인지 가디건인지 알 수 없는 천을 두르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해졌다. 이런 유행에 뒤쳐지면 트렌드 세터가 될 수 없으므로, 나도 물론 감기에 걸렸다. 에취.
 
 보통 이런 상황이면, 일도 하기 싫고 집에 일찍 가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콜록) 
 
 

ⓒ 감기 조심하세요. 죽겠어요 아주.
 
 

 그런데 지난 2주간은, 뭔가 이상했다. 
 평소와 같은 공기, 평소와 같은 분위기였으나 묻어 나오는 긴장감은 평소와 같지 않았다. 우리 층만 이런 건가 싶어 다른 층에 있는 동기들에게 물어보니, 회사 곳곳에서 누가 봐도 아픈 것이 분명한 사람이 아프지 않은 척 행동을 하고, 평소에 매일 탱자탱자 놀던 사람이 갑자기 불과 같은 열정을 보이고, 팀장님 눈에 띄지 않으려 은신술을 사용하던 사람이 팀장님이 보이는 곳에서 큰 목소리로 열성적인 회의를 (콜록거리면서!) 하는 기적과도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 기적같은 일은 우리 팀에서도 일어났다. '회식을 하자'는 팀장님의 지령을 받고 팀원들이 참여 가능한 날짜를 확인하러 한명한명 찾아가 "언제가 편하신가"를 물어볼 때였다. 
 
 "차장님, 다음주에 팀 회식 하려고 하는데요 언제가 괜찮으세요?"
 "나는 아무때나 괜찮아~ 사람들 다 되는 날로 잡아줘."
 "과장님은 언제가 좋으세요?"
 "아 저도 다 괜찮아요. 그냥 편한 날짜로 잡아주세요."
 


 

리 나라는 안그래
 
  
 평소 회식날짜 언제가 좋냐고 물어보면 "나 없는 날로 부탁해!", "저 안가도 되는 날이면 좋겠네요." 라고 하던 분들이 날짜따윈 상관없으니 편한 날로 잡으라니. 그 순간,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의아해 하던 내게 대리님이 답을 알려 주었다. 
 
 "그치.. 다음주 까지가 평가 기간이었지..."
 
 
 그래. 그런 것이었다.
 회사 곳곳에 기적이 발현되었던 이유는 한 해 동안 죽어라 일한 평가를 받는 기간에, 인사권자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어떤 결과를 받게 될지 모른다는 마음이 하나로 모였기 때문이었다. "저 친구는 매일 아프고 골골대서 일을 제대로 하질 못하는구만.", "저 친구는 불과 같이 일을 하는구만!", "저 친구는 도대체 보이질 않는구만!", "내가 회식 하자는데 다들 그런 싫은 표정을 짓다니!!!!" 뭐 이런걸 바라고 원하고 두려우면서 걱정하고, 그랬던 것이다.
 
 회식이 끝나고 팀에 함께 있는 동기와 술한잔을 더 나누면서 우리는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까? 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세명이서 이야기를 했음에도 "이미 평가는 연초에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뭐가 되든 우리는 평균이다.", "본부가 좋은 평가를 받아야 우리도 산다."는 각자의 의견에 격렬히 동의하며 금방 보통의 술자리로 돌아오긴 했지만, 어느새 나도 평가를 받는 회사원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묘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 씁쓸 하구만
 
 
 평가표를 받아 들고 술이 생각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뭐 아무튼, 덕분에 이번 회식은 잡기가 굉장히 수월했습니다. 회식에 대해 물어보면 모두들 하나같이 "니가 알아서 해"라고 말하시는 통에 날짜, 시간, 장소, 메뉴 모두 제 마음대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쭈구리   
오늘도 하루종일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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