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텍스트 안에 당신을 담는다는 것

오늘 하루도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 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얼마 전 후배 한 명이 술을 사달라고 해서 퇴근 후 만나 가벼운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니가 갑자기 웬일로 술을 다 사달라고 하냐? 무슨 일 있어?」
「자소서 쓰고 서로 첨삭해주는 스터디 가입했거든요. 그런데 하다 보니까 이게 그동안의 인생을 돌아보게 만들더라구요. 뭐하면서 살았나- 하는 생각에 씁쓸해져서 사달라고 했어요.」



 
ⓒ 기분 안좋을 때 마시기도 한단다.
 


 취직을 위해 스터디 하나쯤은 당연해져 버린 세상인지라 그가 스터디를 한다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다만 자소설 자기소개서를 '서로' 첨삭해 주는 스터디... 라면 어떤 말들이 오갈지가 궁금해 졌을 뿐이다.
 "입사를 희망하는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상을 잘 파악하고 거기에 맞도록 내용을 작성해야 할 것 같네요." 정도를 이야기 해 주려나? 그러다 보면 결국 자기를 소개하는 글이 아니라 자기의 일대기를 그 회사에 맞는 사람으로 꾸며내는 재창작이 될 텐데. 

 저는 날 때부터 귀 회사에 적합한 인재로 태어났습니다!!



 
ⓒ 바로 노비 말이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들이 추구하는 인재상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A사 
 - 열정과 몰입으로 미래에 도전하는 인재
 - 학습과 창조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재
 -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고 협업하는 인재


2. B사
 - 꿈과 열정을 가지고 세계 최고에 도전하는 사람
 - 팀웤을 이루며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일하는 사람
 -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끊임없이 혁신하는 사람
 - 꾸준히 실력을 배양하여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사람


3. C사
 - 도전 :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업무를 추진함
 - 글로벌 마인드 : 글로벌 상황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네트워크 활용하여 전문성을 개발
 - 협력 : 타 조직을 존중하여 시너지 재고를 위해 타조직과 방향성을 공유하고 타인들과 적극적으로 협동함
 - 열정 : 믿음을 바탕으로 회사/고객을 위해 업무를 주도적으로 수행하여 본인이 끝까지 책임짐
 - 창의 ; 항상 새로운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며 창의적인 사고의 행동을 실무에 적용함



 
ⓒ 저흰 슈퍼맨을 원합니다.
 


 자기의 탄생 설화나 일대기를 각 기업이 추구하는 인재상에 맞추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 일게다. 이렇게 좋은 말로만 점철된 인재를 싫어하는 회사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자기가 이런 인재상에 맞으면서 지원한 직무에도 관심이 많고 역량도 뛰어나며, 나를 뽑았다 하면 절대 후회가 없을 것임을 알려줄 수 있도록 글을 써야 한다는 건데.. 물론 나도 나의 일대기를 재창작 하긴 했지만, 마음에 드는 글을 쓰는 방법은 당연히 모른다.  당장 내 자기 소개서를 참고하겠다며 받아간 친구나 후배들은 다 떨어졌.... (얘들아 미안해. 그래서 내가 미리 말했잖아.)


 
ⓒ 우리 모두 거짓부렁쟁이…

 
 
 다만 해주고 싶은 말은, '위대하신 기업님이 원하는 인재상대로 살아오지 못한 나는 쓰레기야. 나는 이렇게 직장도 구하지 못한 채 영원히 고통받으며 살고 말거라구." 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서류전형에서부터 고배를 마시기 시작하면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한없이 낮아지는데, 이게 자기의 인생을 돌아보는 자기소개서 작성 시즌과 겹치면 마이너스 에너지를 엄청나게 만들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다음 자기소개서도 부실해지고 한번 더 눈물 가득한 술잔을 원샷. 자괴감. 부실. 원샷 의 악순환에 빠져버리게 된다. 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가!



 지금의 구직 프로세스 상 면접을 보기 전에는 구직자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자기소개서 뿐이므로 아마 이 과정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다만 이 과정을 앞으로 어떻게 할지 (면접에 간다면 당신이 작성한 내용을 가지고 질문할 테니까!)를 준비하는 단게로 삼아야지,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데 쓰지는 않기를 바란다.
 과거는 바꿀 수가 없다. (인터스텔라를 보니 블랙홀 중심까지 들어가도 과거를 바꾸는건 불가능한 일이더라.) 반성은 하되 후회는 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탄생설화 지어내기가 어렵다고 너무 절망하지 않길 바란다. 텍스트 안에 자신을 담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지만, 당신이 힘들면 다른 사람도 힘들테니까.


 
 
 취업을 위해 노력중인 모든 이들을 위하여.



쭈구리   
오늘도 하루종일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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