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렛츠, 파이트!

오늘 하루도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 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원소를 무너트리고 중원의 패자가 된 조조는 그 여세를 몰아 형주를 침공한다. 형주는 별다른 저항 없이 조조에게 흡수되고, 이 와중에 근거지를 잃은 유비는 오나라와의 동맹을 준비한다. 유비군을 위해 제갈량이 동오로 떠나고, 그곳에서 제갈량은 오의 군주인 손권을 만나기도 전에 조조와의 전쟁을 반대하는 동오의 중신들과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 키보드 워리어들 간의 아가리 파이팅에서 상대를 모두 굴복시킨 제갈량은 손권을 만나 그마저 설득시키고, 결국 손-유 동맹은 적벽에서 조조를 무찌르게 된다. 정사엔 기록되지 않고 연의에만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말 한마디(라고 순화를 했지만 결국 아가리 파이팅..)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제갈량이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말하진 않았을 겁니다.



 이미 올드 게이머가 되어 버린 나는 나중 시리즈에서 추가된 '설전' 보다는 '일기토'를 훨씬 많이 봤고 친숙하지만, 사실 현실 세계에서 일기토를 보기란 굉장히 어렵다. 그나마 중고등학교 질풍노도의 시기 때는 눈앞에서 일기토 뺨치는 좋은 구경을 한 경우가 몇 번 있었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그런 것은 영화나 뉴스 속에서만 존재하는 일이 되었고, 직장인이 된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일기토의 빈자리는 설전이 메우게 되었는데,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설전을 보고 듣고 느끼고 실제 참전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별 트러블 없이 잘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대를 일기토로 해치우고 싶은 경우에도 설전해야 하기 때문에, 설전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스킬이 되었다.  


 

ⓒ 안녕 친구! 내가 왔어!

 
최근 개봉한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의 5가지 특징만으로 인간이 느끼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모두 나타내고, 심지어 그것들 모두가 이해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가 있다. 게임 삼국지에도 보면, 설전에서 벌어지는 대부분 상황을 몇 가지 키워드로 나타내어 게임상에 구현해냈는데 '무시’, ‘대갈’, ‘궤변’, ‘진정’, ‘흥분' 이 그것이다.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설전은 기본적으로 어떠한 '주제'로 시작하고, 그 주제와 맞는 이야기를 해야 하며 주제와 동떨어진 이야기를 한 사람은 '멍청이' 정도로 생각해 데미지를 입게 되지만, 승패를 가르기 위해서는 이런 기본 규칙뿐 아니라 앞서 말한 저 '화술' 들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해야 한다. 그리고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저 화술들을 잘 다루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아가리 파이터 - 가 아니라 설전왕 ... 도 아니고 말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곤 한다. 저 화술들을 사용하는 경우는 보통 다음과 같다.


- 무시 : 상대 설전패를 완전히 흘려 넘긴다. (화를 내든 헛소릴 하든 혼자 흥분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통상 설전패나 화술 가리지 않고 회피할 수 있지만 (주제에 맞는 말을 하든 무슨 소리를 하든 흘려 듣는다는 뜻이다.) 상대의 분노 게이지가 크게 올라간다. 설령 정황상 상대가 옳고 자신이 틀렸을지라도 이 스킬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나, 몇몇 용사들은 하급자일떄도 상급자를 대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상대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확실히 대답하지 않고 그저 흘려듣고 흘리듯이 답하며, 이런 사람과 회의를 할 경우 열 받는 것은 물론이고 아무리 장시간의 회의를 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주의점이 있으니 상대 할 때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 대갈 : 호통으로 강력한 공격을 날리는 화술. 통상 설전패 및 궤변을 무효시키며 공격하는데, 이는 상대가 무슨 소리를 해도 결국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상황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전혀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되는 부분에서 큰 소리를 내며 갑자기 '흥분'과 연계하여 사용한다면 회의실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얼어붙게 될 것이다. 이 또한 보통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가끔 동일 직급 내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하급자의 경우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대갈' 공격을 당한다면 기분이 나쁜 것은 둘째치고 자신이 뭔가 잘못한 일이 있는것은 아닌가- 하고 급격히 불안해 지게 된다.

- 궤변 : 통상 설전패를 무시하며 강제로 화제를 바꾸는 화술. "업무와 관련하여 A로 할지 B로 할지 정책을 정해야 하니 회의를 합시다. 전 A가 좋다고 생각합니다!"는 상대에게, "그런데 당신은 왜 회의를 그런식으로 진행하느냐!" 며 전혀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기술이다. 상대가 '무시' 하거나 '진정' 하고 있다면 별 효과가 없으나, 만약 이 말을 듣고 '흥분' 한다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회의를 끌어갈 수 있기 때문에, 회사생활이 오래되어 노련미가 하늘에 닿은 사람들이 종종 사용하곤 한다. 다만 눈앞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진정+대갈'을 보유하고 있는 상급자에게 사용했다가는 정말 호되게 대갈을 당할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 무슨 개소리냐! 란 말이 절로 나옵니다.


 - 진정 : 상대의 분노 게이지를 낮추는 화술.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고 있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진정'이 필요하다. 궤변+무시를 통해 상대를 흥분 상태로 만들어 놓은 뒤 "아니 회의하면서 뭐 저렇게 흥분하고 소리를 지르세요? 우리 싸우러 온 게 아니라 회의해서 이슈 해결하려고 온 거잖아요?" 라는 식의 변칙적 사용도 가능한데, 이럴 경우 눈 앞의 전투에서 승리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더 호된 분노와 미움을 사서 결국엔 손해를 보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이런 치사한 짓은 애초에 하지도 말자. 집에 가서 이불 걷어차면서 잠들 때까지 열 받는다.
 
- 흥분 : 자신의 분노 게이지를 높이는 화술. 가장 쉬운 이해 방법은 자기가 말하면서 자기말에 스스로 흥분하는 사람을 떠올리면 되겠다. "오늘 해결해야 할 이슈는 A입니다. 와.. 근데 어떻게 A가 이슈죠? 이건 정말... 아니 A가 이슈인게 말이 되냐구요! 이게 뭡니까 도대체! A 담당자는 어디로 간 거야!!" 랄까. 상대가 분노한 상태일 때 '진정'으로 상대의 분노 게이지를 낮추거나, '흥분'으로 자신의 분노 게이지를 상승시켜 맞불을 놓거나 하는 식으로 사용하게 된다.
 
 
 게임에서야 예형을 만나거나 부하 장수가 재야 문관을 추천할 경우에나 벌어지는 설전이지만, 현실에서는 일기토보다도 훨씬 자주 벌어지기 때문에 쭈구리들은 각 화술에 대해 잘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저 모든 화술을 압도할 수 있는 최강의 패가 '진심' 이라면 참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으니 당장 나부터라도 저 화술들을 다시 한 번 봐야겠다. 


 
 
ⓒ 회의할 때마다 이렇게 웃어줄 테다


절대 집에 가서 게임하겠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이미지출처 : 구글
 

쭈구리   
오늘도 하루종일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 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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