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프리퀄이라고나 할까요

오늘 하루도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 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믿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회사에서 일을 정말 열심히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 연락이 뜸하던... 이라기 보다 거의 연락이 없던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형,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아 덕분에 그럭저럭 잘 지낸다. 너는 요새 어떠냐?"

 
 How are you? -> I'm fine thank you, and you? 와 다를 바가 없는 기초 회화가 한참이나 오간 뒤, 그 후배는 겨우 본론을 꺼냈다.

 
"형, 이번에 형네 회사 원서 좀 써보려고 하는데요.. 혹시 형 쓰셨던 자기소개서 좀 보내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아.. 올해도 어김없이 원서 접수의 계절이 돌아왔구나. 그리고 올해는 너희까지가 이 취업 전쟁에 참전하는구나.


 

ⓒ 어서와 취업전쟁은 처음이지?


그러고 보면 나도 자소서를 쓰기 위해 이리저리 샘플을 구하러 다렸더랬다. 공유해 주길 꺼려하는 선배들의 자소서를 '다른 곳에는 절대 퍼트리지 않고 나 혼자 보겠다' 는 전제하에 공유 받고, 자화자찬으로 가득 찬 그들의 자소서를 보며 '왜 이렇게 공유해 주는 것을 꺼려했는지' 알게 되면서, 나의 자소서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차마 누구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형태로 완성되어 갔다. '그거 아세요? 저의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보니 저는 이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살아온 거였더라고요. 제가 겪은 삶의 모든 이벤트는 입사 후 어떤 일을 겪어도 잘 대처할 수 있기 위한 밑그림이었고, 거기서 제가 얻은 교훈들은 이 회사를 세계 최고의 회사로 키울 수 있는 역량을 기르기 위해서였답니다.' 
 지금 보면? 개똥같은 소리다.
 누가 보내 달라고 하면? 아마 절대 못 보여줄걸...
 
이런 자소서들만 신나게 쓰다 보니 나의 서류 전형은 낙방의 연속이었다. 지금처럼 짜여진 구성 안에서 복사+붙여넣기만 했다가는 낙방왕이 될 것 같다는 불안감에 '정성들여 제대로 써보자' 고 했던 자소서 하나가 나를 서류전형에서 살아남게 해 주었고, 드디어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다. 


 

ⓒ 내 자소서는 파이러츠도킹 6!

 
회사에서 왜들 그렇게 자소서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는 면접장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하긴 처음 만난 사람 다섯 명을 한 방에 앉혀 놓고 하루 종일 질문을 해야 하는 면접관들이 얼마나 힘들까. 초면에 궁금한 것도 딱히 없을 텐데 어쨌든 질문은 해야 하니까. 자연스레 그들의 눈이 자소서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놈이 대체 뭐라고 떠들었나...' 하고서.
 조금 일찍 들어간 동기들은 자소서 내용과 다른 변칙 질문도 받았다고 하는데, 다행히 나는 자소서에 있는 문항을 그대로 물어봐서 큰 어려움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합격시킨 내용 그대로 말했으니 합격이겠지.'라고 대충 생각했던 것이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발상이었는지는 나중에 인사팀 과장님과 친해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다행히 면접을 통과하고 나는 드디어 인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날 팀장님이 불러 면담을 했는데, 그 내용 역시 자소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을 보면서 '아 이건 계속 가는구나.'라고 느꼈다. 내가 부장이 되어도 자소서는 남아있지 않을까? "자소서에는 이렇게 열심히 일하겠다고 하더니 과연 그래왔는가?!"를 비교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그것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회사를 그만두거나 이직을 할 때일 것이다. "아니 입사할 때 영혼을 바치겠다며? 근데 간다고?"


 

ⓒ 찰지구나


미안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말한 대로만 살까요.
어쨌든 입사는 했으니 앞으로도 잘 부탁 드립니다.




역시 인생의 진리는 술자리에서 나온다는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술 한잔 하실래요?



이미지출처 : 구글


쭈구리   
오늘도 하루종일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 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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