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WHY?]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속내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끊임 없이 관계를 맺는 일이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고 그만큼 공을 들인다. 사람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예의, 배려, 존중, 이해 같은 것들은 관계를 유지하고 심화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그런 수단들 중에서도 고급에 속하는 것이 공감(共感)이다. 공감은 다른 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어떤 감정일지 유추해내어 동일하게 느끼는 현상을 말한다. 공감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Empathy는 미국의 심리학자 에드워드 브래드포드 티치너(Edward Bradford Titchener)가 1909년에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공감이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적절한 공감은 관계의 밀접함을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하며, 동시에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만들기도 한다. 공감은 대인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현상이 아니다. 우리 삶의 실체적 울타리라고 할 수 있는 공동체(사회)에서 발생하는 일에 대한 민감성도 공감의 수준으로 결정된다. 사회적 사건에 대한 관심, 참여, 공론화 같은 것들은 공감능력 없이 생길 수 없는 것들이다.

 

사회의 관계망이 조밀해지면서 공감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흐름이다. 사람들은 공감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존감을 얻기를 바라고 다른 이에게 의미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공분하여 인터넷 사이트에 댓글을 달거나 광장에 모이는 일도 공감의 힘이다. 하다 못해 SNS에 올린 사진 하나를 올려도 공감을 얻길 바라고, 또 공감을 하고자 애쓴다. 그 결과 맛보게된 공감에 대한 긍정적인 경험들은 공감을 상호 교환하기 위한 노력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공감을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다. 어디를 가도 공감 능력이 평균 이하라고생각되는 사람들이 있다. 직장도 예외는 아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유난히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대체로 상사가 공감능력이 부족할 때 부하 직원들의 마음고생이 더 심해지지만, 직급에 관계없이 그런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은 퍽 고단하다. 사적인 대화나 일상 생활에서는 서로 공감을 바라지 않으면 그만이다. 동료 직원은 어디까지나 같이 일을 하는 사람이지 백년해로를 할 사람이 아니다. 사적으로 공감하는 관계가 되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다. 하지만 함께 일을 할 때는 그 결여된 공감능력이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급한 일이 생겨서 팀 전체가 이리 뛰고 저리 날고 난리인데 자기 일 끝났다며 무덤덤하게 퇴근 인사를 올리는 팀원을 보면 속이 아무렇지 않기가 어렵다.

 

직장에서 각자의 역할과 책임이 있는 것은 맞지만 업무라는 것은 결국 결국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어깨를 부딪히며 함께 해야 한다. 그런 와중에는 당연히 감정이 생기게 되고 업무를 위한 소통(communication)에는 그런 감정의 공유가 포함된다.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과는 그러한 감정의 공유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소통도 잘 되지 않아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효율이 떨어지는가 하면 괜한 마음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일도 생긴다.

 

공감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 당사자는 '자기 맡은 일 잘하면 되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한다. 심지어 그 부류의 사람들은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마저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대화라는 것은 단순히 말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감정도 오가는 행위다. 한쪽에서 감정의 피드백을 거부하면 원만한 대화가 되지를 않는다. 한쪽의 감정이 갈 곳을 잃고 공중에 떠버리는 순간 진지한 물음은 영양가 없는 지적질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쯤 되면 이 사람의 속내가 뭘까 하는 궁금증은 미궁 속에 빠져버린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도, 남의 감정에 공감하려 들지도 않는 그들의 속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싫음과 미움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는 더 많이 공감하려고 한다. 그 공감이 친밀감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사람이 싫을수록 그 사람에게 공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싫은 대상이 뿐만 아니라 미워하는 대상도 같은 처지다. 미워하는 대상에게는 미워서라도 공감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은 기본적으로 상대를 멀리 하려는 욕망을 불러온다. 당연히 멀리하고 싶은 대상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공감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공감능력이 떨어지거나 공감에 인색한 그 직원은 어쩌면 나를 미워하거나 부서나 회사를 싫어할 수 있다. 밉고 싫어서 공감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할 수도 있다. 애정이 없다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애정이 아닌 다른 감정을 실은 대화는 나눌 수 있다. 옆자리에 앉은 김대리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 꼭 김대리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친밀감이나 유대감 정도만 있어도 적당한 공감을 동반한 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사랑 고백을 하는 것도 아닌데 가벼운 공감 정도야 못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런 공감이 직장생활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직장인이라면 다 안다. 하지만 대상이 밉고 싫다면 그런 친밀감이나 유대감조차 생기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공감을 바라는 것은 무리다.

 

과잉된 자기애

자기애가 넘쳐나는 사람들도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애의 과잉'은 칸트가 말한 '자기 보존의 충동' 수준을 넘어 나르시시즘(자기애적 인격 장애)에 가깝다. 자기애가 과잉된 사람은 외부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도 당연히 관심이 없다. 의지로 그러한 태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의 과잉으로 구축된 정신의 메커니즘에 따라 그렇게 느낀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행동인 것이다. 자신의 그러한 상태에 대한 지적에도 무덤덤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지적에 실린 감정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덤덤한 것이다.

 

특히, 상사가 자기애의 과잉에 빠졌을 경우 그의 무관심은 '오만'이라는 감정으로 부하직원들에게 표현된다. 스피노자의 정의를 빌자면 오만은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상사의 오만은 자신의 지위에 대한 우월감에서 온다. 그 우월감은 그 지위를 획득한 자신에 대한 애정을 과잉 상태로 만들고 상사 스스로를 직원들 이상의 존재로 여기도록 한다. 그런 상사가 직원들의 감정 따위에 관심이 갖을 리 없다. 또 다른 우월감을 획득해 더 오만해지고, 자기애에 더욱 함몰하는 데 열중할 뿐이다.

 

오해하지 말하야할 것은 자기애의 과잉은 이기주의와 다르다는 점이다. 이기주의는 공감을 한다. 다만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을 뿐이다. 쉽게 말해 "갑자기 일 터져서 힘들겠네..."라고 공감은 하지만 그 뒤는 "그런데 내 일은 아님."으로 마감하는 것이 이기주의다.

 

무관심

주변에 무관심한 사람도 공감능력이 부족해 보인다. 이들이 무관심이 공감능력의 부족으로 이어지는 것은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과는 달리 이들은 의식적으로 공감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특정 대상이나 사안에 무관심해질 수 있다. 외부에 대한 관심을 차단하게 되면 공감의 이유가 없어진다. 관심 없는 대상에 대해 굳이 공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공감에도 에너지가 들어간다. 외부에 에너지를 쓰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되면 처음부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효율적이다. 한편으로는 에너지를 내부에 집중해서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예를 들어 당장 처리해야할 급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외부에 대한 관심을 의식적으로 차단한다. 한시적이나마 공감에 쓰일 에너지를 아끼는 것이다.

 

반면에 지속적으로 주변에 대해 관심을 차단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나 주변의 일에 관심을 가졌을 때 생길 심리적인 피곤함이 싫어서 의식적으로 외부에 대한 관심을 차단하는 것이다. 관심이 없으면 공감도 할 이유도 없다. 그저 주어진 자기 일만 할 뿐 동료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거나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간혹 공감하는 일이 힘들고 어려워서 공감할 관계를 만들지 않는 사람도 있긴 하다. 하지만 많은 경우는 자신의 주변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음으로써 애초부터 공감의 고리를 차단하려는 의도다.

 

지능의 문제

공감능력의 결여는 지능의 문제일 수도 있다. 결코 비아냥대는 얘기가 아니다. 말이 쉬워서 공감이지 공감은 누구나 쉽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서점에 공감의 위력과 방법을 설명하는 책들이 즐비한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다. 그만큼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다. 공감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상황을 분석하고, 자신의 경험과 통찰력을 동원해 상대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유추해야 한다. 시간도 한정 없이 주어지지 않는다. 한참을 생각할 시간의 여유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 순간적으로, 때로는 몸짓이나 표정만으로도 상황을 분석하고 상대의 감정을 알아내야 한다. 이는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과정이다. 지능의 역할이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하다. 쉽게 말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으면 공감도 어렵다.

 

한 가지 보태면, 공감은 연민이나 동정과는 다르다. 연민, 동정은 상대를 타자(他者)의 위치에 두었을 때 갖게 되는 '정신의 반응', 즉 감정이다. 반면에 공감은 나를 상대에게 대입해야 가능하다. 유시민 작가의 말을 빌자면 그 사람이 되어서 생각해보는 '내재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 작업에서 이성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비록 지능이 이성을 대표하거나 이성의 전부를 차지하지는 않지만, 내재적 접근에서 지능이 역할을 빼버리면 '동감(同感)'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동감은 글자 그대로 심리적 동일감을 느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외에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성향이 있는 사람에게서도 공감능력의 결여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런 극단적인 경우는 일상적인 직장생활에서는 적용하기 어려우므로 논외로 하자. 또, (상황을) '몰라서'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공감능력의 결여는 누구나 알만한 상황에서도 공감이 안 되는 경우를 뜻하니 역시 논외다.

 

직장생활에서 공감능력이 모자라거나 공감을 거부하는 사람의 속내는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아쉽게도,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해서 단번에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보면 알게 되듯이, 사람은 쉽게 성향을 바꾸지 않는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법들이 쏟아져 나오긴 한다. 하지만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지는 해결 방법은 아직 없다. 어쩌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이기 때문에 여전히 그것에 관한 논의가 계속되고 사람들의 고민도 이어지는 것일지 모른다. 비록 문제 해결에 바로 다가설 수 없겠지만, 짐작의 실마리 몇 개를 갖는 것만으로도 속은 좀 편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유도 모른 채 맞는 것보다야 왜 때리려는 지 알고 맞는 게 그래도 속이 좀 덜 갑갑한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이유를 알면 나의 생각과 태도의 방향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이 작은 덤이다.




-배너 클릭시 작가의 개인 채널로 넘어갑니다.

오피스Wa 목록보기
맨 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