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차장님께서 잘 챙겨주십니다

오늘도 하루종일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대한민국에서 정해놓은 정규 교육 과정을 어느 정도 이수한 사람이라면, ‘압존법’이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듣는 사람을 높이기 위해 대화의 대상이 되는 상대를 낮추는 어법. 특정 대상 앞에서 주의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연계해 ‘앞존법’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정식 명칭은 ‘압존법’이며 한자어다.

동방 예의지국이라 불리는 우리 민족의 예의 바름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어법이긴 하지만, 사실은 외국인한테나 한국인한테나 한국어를 더욱 까다롭게 만드는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시험 문제로 출제가 될 때도 까다로운데, 실생활에서 사용하자면 더욱 까다로우니 이거 참 환장할 노릇이다.


ⓒ 그러게요.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요.
 
미리 사과하고 시작하겠다. 군대 얘기.. 한번 더 해야겠다. 현대 한국어에서 존댓말 사용이 점점 단순화됨에 따라 압존법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이 줄었지만, 군대에서는 강제적으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군대 얘기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대 얘기라고 해 봐야 오늘은 엄청나게 짧다. 오히려 사과의 말이 더 길어 보이는 건 분명 기분 탓이니 오해 없길 바란다.
 
병장 : 밥은 먹었냐?
이병 : 김 XX 상병님께서 일 끝나면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이 날 이 이병이 있는 생활관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여자의 경우는 존댓말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남자들에 비해 보다 자유로운 면이 있다. 애교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순간적으로 ‘응응’이라고 대답해도 귀엽게 봐주는 경우도 다반사다. 하지만 저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군 생활을 한 남자들의 경우, 존댓말 사용은 굉장히 주의해야 할 일이며 여자들처럼 자유롭지도 못하다. 때문에 남자들은 압존법 사용에 있어 보다 민감하고 보다 주의 깊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쭈구리가 아닌가. 세상에는 ‘잘 해도 혼나는’ 일도 부지기수다.
 
팀 배치 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전히 허우적대고 있을 무렵, 우리 팀의 B 부장이 나를 불러 회사 생활은 잘 적응하고 있는지를 물어봤다. 수업시간에 좀 졸긴 했지만 교육과정을 충실이 이행한 나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네. H 차장이 잘 챙겨줘서 조금씩 적응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순간 B 부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임마 H 차장이 잘 챙겨줘서가 뭐냐. 차장님이 잘 챙겨주셔서서- 라고 해야지.”
“아… 네 부장님. 부장님께 말씀드리는 거라 압존법을…”
“그래도 임마. 앞으로는 조심해라.”
“예..”
 
내게 압존법을 알려준 선생님들과 따뜻하게 갈궈준 군대 고참들에게 한점 부끄럼 없이 완벽한 압존법이었는데 이게 무슨 소리지?!  앞으로 조심하라니… 부장님과의 면담 이후에도 하루 종일 압존법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학창시절에 이랬으면 국어는 항상 100점이었을 텐데!


ⓒ 직장내 대화 예절. 인터넷에도 이렇게 나오는걸요ㅠ
 
잘 해놓고 욕을 먹은 이후로, 나의 압존법 사용 빈도는 대폭 감소했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주위 팀원들이 말하는 것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를 높이는 말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고 특별히 권위위식을 갖은 높으신 분께 말할 때나, 직급 차이가 2~3단계 정도 나는 경우에만 압존법을 쓴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적용되는 법칙은 비단 압존법뿐이 아니었다. 단순히 이야기를 할 때부터 업무 보고, 심부름, 보고서 작성 등등 이런 법칙이 전방위로 적용되고 있었다.
 
 
 결국 요즘의 나는, 그냥 모두를 존대하고 존중한다. 심지어 후배에게도. (물론 그 후배가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것은 절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 주는 세상. 얼마나 아름다운가? 물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압존법을 사용하는 것이 귀찮아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그냥… 그렇다.
 
  
이 얘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야 그런 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해야지 멍청아.” 라는 해결책을 주었습니다. 아무래도 이 친구에게는 제가 정말 멍청이로 보이나 봅니다. 설마 제가 그걸 몰라서 쭈구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쭈구리   
오늘도 하루종일 쭈구리고 있었더니 온몸이 너무 아프다. 이 근처에 우리 회사 사람은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술도 한잔 했겠다 얘기나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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